-가슴이 탁 트이고 시야가 넓어지다-


김종직(金宗直 1431~1492)


영신사(靈神寺)에서 잤는데, 승려는 한 명뿐이었다. 절의 북쪽 절벽에 가섭(迦葉)의 석상 한 구가 있었다.세조대왕 때에는 늘 환관을 보내 분향하게 하였다.그 목에 난 흠집도 왜구가 낸 자국이라고 한다. 아! 왜구는 참으로 잔악한 도적이구나. 사람을 남김없이 살육하고 성모상(聖母像)과 가섭상의 머리에도 칼자국을 냈으니, 단단한 돌이지만 사람의 모습을 본떴기 때문에 화를 당한 것이 아닐까? 가섭상의 오른팔에 흉터가 있는데 불에 그슬린 듯하였다. 해공이 다시 말하기를 “이는 겁화(劫火)에 그을린 것으로 조금 더 타면 미륵세상이 된답니다.”라고 하였다. 돌에 난 흔적이 본래 그러한 것인데 황당하고 괴이한 말로 어리석은 백성을 속여 내세의 이익을 구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다투어 돈을 보시(布施)하게 하니, 참으로 가증스럽다.

가섭상의 북쪽 봉우리에 두 개의 바위가 우뚝 서 있는데 이른바 좌고대(坐高臺)이다. 그중의 하나는 아래가 반반하고 위는 뾰족하여 꼭대기에 네모난 돌을 이고 있는데, 그 넓이는 겨우 한 자 정도였다. 승려들의 말에, 그 위에 올라가 예불을 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하인 가운데 옥곤과 염정이 그 위에 거뜬히 올라 절을 하였다. 나는 절에서 바라보다가 급히 사람을 보내 그들을 꾸짖어 그만두게 하였다. 이들은 너무나 어리석어 숙맥(菽麥,옛날 속담으로 콩과 보리도 구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말로는 ‘쑥맥’이라 한다.)도 구별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이렇게 스스로 운명을 판단하니, 승려들이 백성을 능란하게 속이는 것은 이를 보아도 알 수 있다.

법당에 몽산(蒙山,중국 원나라 때의 고승으로 려말 나옹화상과 교류한 인물)을 그린 족자가 있는데, 그림 위쪽에 이런 찬(贊)이 있었다.

불도를 닦는 것이 제일이니(頭陁第一)
이는 번뇌를 떨치기 위한 것(是爲抖擻)
밖으로는 속세를 멀리 하고(外已遠塵)
안으로는 찌든 때를 씻었네(內已離垢)
도를 얻은 것 먼저였고(得道居先)
적멸에 든 것 뒤였네(入滅於後)
눈 덮인 계산(雪衣雞山)
천년토록 썩지 않으리(千秋不朽)      

그 곁에 전서(篆書)로 작게 ‘청지(淸之)’라는 낙관이 찍혀 있었는데, 이는 바로 *비해당(匪懈堂)의 삼절(三絶)이다.[*비해당은 세종의 아들 안평대군 이용(1416-1453)의 호이고 청지는 그의 자이다.삼절은 시.서.화를 말한다. 이 그림과 찬(贊)의 글씨가 안평대군의 솜씨라는 말이다.]

법당 동쪽 섬돌 아래에는 영계(靈溪)가 있었고, 서쪽 섬돌 아래에는 옥천(玉泉)이 있었다. 이 샘은 물맛이 매우 달았다. 이 물로 차를 끓이면 중냉천(中冷泉,중국 강소성 진강현 서북쪽에 있는 샘물 이름)과 혜산천(惠山泉,중국 강소성 무석현 서쪽 혜산에 있는 샘물 이름))도 이보다 더 낫지 못하리라. 샘물의 서쪽에 무너진 절이 덩그렇게 있었는데, 이것이 옛 영신사이다. 그 서북쪽 깎아지른 봉우리에 있는 작은 탑은 돌의 결이 가늘고 윤기가 났다. 이 탑도 왜구가 무너뜨렸다. 뒷날 가운데 철심을 박고 다시 쌓았지만 유실되었다.

18일, 일찍 일어나 문을 열고 섬진강 조수(潮水)가 불어난 것을 바라보았다. 바로 물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것이었다. 밥을 먹고 모두 절의 서북쪽으로 가 영신봉(靈神峯) 위에서 쉬었다. 멀리 반야봉을 바라보니 대략 60여리 쯤 되었다. 그러나 발이 부르트고 근력이 이미 다해서 가보고 싶었지만 강행할 수 없었다. 곧바로 지름길을 따라 내려가니 길이 더욱 가파르고 험했다. 나무뿌리를 붙잡고 돌 모서리를 밟으면서 수십여 리를 내려왔는데, 모두 그런 길이었다.

동쪽을 향해 우러러보니 천왕봉이 지척에 있는 듯하였다. 대나무 가지에는 열매가 달린 것도 있었지만 사람들이 모두 따버렸다. 소나무 중에 큰 것은 백 아름이나 될 듯한데 산골짜기에 즐비하게 서 있었다. 모두 평소에 보지 못하던 것들이었다. 가파른 곳을 내려와 두 골짜기 물이 합쳐진 곳(한신계곡과 지계곡이 만나는 가내소폭포)에 이르렀다. 세차게 흐르는 물소리가 산기슭에 진동했다. 맑고 깊은 못에는 물고기들이 여유롭게 노닐고 있었다. 우리 네 사람은 두 손으로 물을 떠서 입을 헹구고 언덕을 따라 지팡이를 끌면서 걸었는데 매우 즐거웠다.

골짜기 입구에는 초라한 사당이 있었는데, 하인들이 말을 끌고 먼저 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말을 타고서 실택리(實宅里,함양군 마천면 강청리 실덕마을)에 다다랐다. 노인 몇 명이 길 왼쪽에서 우리를 맞이하였다. 절을 하고 말하길, “우리 사또께서 두루 유람하셨는데도 별고 없으시나, 감히 하례를 드립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공무를 제쳐두고 실컷 유람하였는데도 백성들이 탓하지 않으니, 나는 그제서야 안심이 되었다.

해공은 군자사(君子寺, 함양군 마천면 군자리에 있었던 절)로, 법종은 묘정사(妙貞寺)로 가고 조위,유호인,한인효는 용유담(龍遊潭,함양군 휴천면 임천강 상류에 있는 못)으로 유람을 떠났다. 나는 등구재(登龜岾, 마천면 창원리에서 합양읍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넘어 곧장 군의 관아(官衙)로 돌아왔다.

유람한 것은 겨우 닷새지만 가슴이 탁 트이고 시야가 넓어짐을 느낀다. 비록 처자와 아전들이 나를 보더라도 떠나기 전과 달라졌다고 여기리라.

아! 지리산은 숭고하고도 빼어나다. 중국에 있었다면 반드시 숭산(崇山)이나 대산(岱山)보다 먼저 천자가 올라가 봉선(封禪,봉은 영산에 올라가 하늘에 지내는 제사,선은 땅에 지내는 제사이다)을 하고 옥첩(玉諜)의 글을 봉하여 상제(上帝)께 올렸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무이산(武夷山)이나 형악(衡岳)에 비유해야 할 것이다. 한창려(韓昌黎,당나라 때의 문장가 韓愈),주회암(朱晦菴,남송의 유학자 朱熹),채서산(蔡西山,송나라 때의 학자 蔡元貞) 같이 학식이 넓고 단아한 사람이나 손흥공(孫興公 진나라의 孫綽),여동빈(呂洞賓,당나라의 呂巖),백옥섬(白玉蟾) 같이 연단술(鍊丹術)을 수련하던 사람들이 옷깃을 나란히 하고 뒤따르며 그 속에서 배회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오직 용렬한 사람, 도망친 종, 신분을 숨긴 자, 불법을 배우는 자들의 소굴이 되고 말았다.

우리가 오늘 이 산에 한 번 올라 유람하여 겨우 평소의 소원을 풀기는 했지만, 공무에 매여 바쁘다보니 청학동을 찾아가고 오대사(五臺寺) 를 들르는 등 그윽하고 기이한 곳을 두루 유람하지 못하였다. 어쩌면 이 산이 나로 하여금 그런 곳을 만나지 못하게 한 것은 아닐까? 두자미(杜子美,당나라의 시인 杜甫)의 “방장산(方丈山, 지리산의 다른 이름) 은 바다 건너 삼한(三韓)에 있네”라는 구절을 길이 읊조리니, 나도 모르게 정신이 아득해진다.    

임진년(성종 3년,1472) 추석이 5일 지난 날,이 글을 쓰다.


*김종직(金宗直 1431~1492)

본관은 선산,호는 점필재.밀양 서대동에서 태어났다.16세 때 과거시험에 낙방하였으나 그때 지은 '白巖賦'가 세종의 마음에 들어 영산현(靈山縣)의 훈도(訓導)에 임명되었다.23세 때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서 수학했다.29세때에는 문과시험에 합격하였고 40세 때인 1470년 함양군수로 나아갔다.이때 훗날 무오사화(戊午史禍)의 한 원인이 된 유자광(柳子光)의 글을 불태워버렸다.1472년 지리산을 유람하고 "遊頭流錄"을 지었다.
  
점필재는 고려 말 정몽주(鄭夢周)와 길재(吉再)의 학풍을 이어받은 부친 김숙자(金淑滋)에게 배워 영남학파의 우두머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절의(節義)를 중시하는 조선시대 도학의 정맥을 이어가는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그의 사상은 제자 김굉필,정여창,김일손,유호인,남효온,조위 등에게 이어졌다. 특히 김굉필의 제자 조광조(趙光祖)에게 학풍이 계승되면서 그는 사림파(士林派)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그가 추구하는 바는 화려한 시문이나 형식미를 따르지 않고 효제충신(孝悌忠信)의 학문 성향과 정의를 숭상하고 시비를 분명히 밝히려는 의리적 성격을 지녔다.

점필재는 성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그의 문인들이 많이 벼슬길에 올랐다.이들은 기성의 훈구파(勳舊派)와 갈등을 일으켰고, 급기야 1498년 김일손이 점필재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수록한 것으로 인해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이로 인해 그는 부관참시를 당하였고 문인들도 참화를 입었다. 저서로는 '점필재집','청구풍아' 등이 있으며 '동국여지승람','일선지',이촌록 등을 편찬했다.  


<참고>

지리산 기행:1472년(성종 3)년 8월 14일~8월 18일)

동행:유호인,조위,임대동,한인효,해공,법종,아전 옥곤,용상,하인

일정

8/14 함양군 관아-엄천-화암-지장사-환희대-선열암-고열암

8/15 고열암-(쑥밭재)-청이당-영랑재(하봉)-해유령-중봉-마암-
       천왕봉-성모사

8/16 성모사-통천문-향적사

8/17 향적사-통천문-천왕봉-통천문-중산(제석봉)-세석평원-창불
       대-영신사  

8/18 영신사-영신봉-(한신계곡)-(백무동)-실택리-등구재-함양
       군 관아

<끝>